오광수/미술평론가

한국인들과 종이와의 관계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독특한 문화적 항(項)으로 작용되어 왔다. 일찍이 동양 3국(중국, 일본, 한국)에서는 종이문화가 발달된 지역으로 꼽고 있거니와 그 가운데서도 한국에서 제조생산된 종이의 질이 뛰어나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귀중품목으로 통용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종이는, 특히 한국인들에게 있어 그 용도는 대단히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순한 문방(文房)용으로서의 용도를 벗어나 생활 전영역에 넓게 퍼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문화생활의 대표적 품목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서민의 생활 깊숙이까지 그 쓰임새가 퍼져 있다는 것이다. 문화생활의 대표적 품목이란 말할 나위도 없이 문방(文房)문화로 대표되는 동양의 특수한 문화패턴에서 종이가 차지하는 영역을 말하는데, 글씨를 쓰는 소지(素地)로서, 인쇄매체로서, 또는 서예나 그림을 담는 소지로서 폭 넓게 쓰이고 있음이다. 생활구조에서 종이가 차지하는 영역은 먼저 건축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한옥에서 가장 빈번히 만나는 창호(窓戶)는 나무 설주에 종이를 바른 것으로, 한옥에서 자라거나 생활해온 한국인들에게는 가장 친근감이 가는 소재이기도 한다. 또한 방안(온돌방)의 장판지에서부터 벽지에 이르기까지 한국 가옥의 내부는 온통 종이로 뒤덮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종이를 매재(媒材)로 해서 만든 각종 일상용품의 수는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 가운데서도 물건을 싸서 두거나 넣어두는 용도로서 종이가 애용된 것은 청결성의 유지와 습기의 방지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전시대의 한방(漢方)엔 마루와 방의 천정에 수 많은 종이 약봉지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습기나 벌레가 타지 않게 고안된 것이다. 한약 특유의 약초냄새와 더불어 신기하게 매달려 있는 약봉지들을 올려다보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전광영의 근작-종이에 의한 오브제 작품들을 보면서 먼저 연상된 것은 이미 오래전에 보았던 한방의, 종이로 포장된 배곡히 천장에 매달려 있던 약봉지들이었다. 작가도 나와 꼭 같은 경험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가계(家系)에 한방을 경영하는 분이 있어 그러한 종이봉지에 대한 시각적 체험은 더욱 강하고 친밀한 것임을 헤아리게 하고 있다.
우선, 그는 스티로폴로 일정한 크기의 삼각모형을 만들고는 이를 다시 종이(한지)에 싸서 역시 같은 종이로 꼰 끈으로 묶는다. 이렇게 포장된 삼각모형은 커다란 화판 위에 차곡차곡 부착되어 나간다. 두께가 있는 삼각자 모양의 오브제들을 화판에 부착해 나갈 때 옆면만 드러나게 하고 삼각의 면은 옆으로 묻히게 하고 있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난 것은 예각진 모서리만이 총총하게 엮어져 있는 모습이다. 그것들을 마치 종유석과 같은 돌기(突起)형상을 띠면서 동시에 옆면의 일정한 두께들로 단속적(斷續的)인 붓 자국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주고있다. 같은 모양의 삼각형을 부착해 나가는 과정에서 변모를 줌으로써 하나하나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동시에 전체의 통일이란 규제 속으로 수렴되어지는 방법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작품은, 그 방법상에서나 발상에 있어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그 유형을 찾을 수 없는 독자 한 것으로 돋보이고 있다.

각 작품이, 그러나 한결같지 않고 그 나름의 변화를 보이는 것은 종이의 색채 또는 종이의 질에서 연유된다고 할 수 있다. 재래식의 수공업의 방법에 의해 제조된 한지는 우선 그 질에 있어 현대적 펄프제작과는 다른 독특한 맛을 지니고 있는 바, 전광영의 전체작품에서 받는 첫 인상도 바로 이 독특한 종이의 질이 갖는 정서라 할 수 있다. 종이들이 한결같지 않고 거친 것에서부터 아주 엷고 섬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층의 변화가 있고 거기다 순지와 색지가 있어 그것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가 생겨나게 된다.

종이(한지-재래식 제조방법에 의한)의 사용은 작가에 따라 그것의 방법적 수용이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처음 현대 작가들에게 한지가 주요한 매재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주로 드로잉을 위한 바탕(소지)에서였다. 사용빈도가 증가되면서 점차 단순한 소지로서보다 한지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속성과 그것이 우리의 정서 속에 잠재되어 있는 소박한 정감을 다시 일깨우는 자각현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우리 고유의 재료에 대한 발견과 더불어 잊혀졌던 고유한 미의식의 일깨움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한지의 매재적 용도는 소지로서 사용하는 경우 외에 한지의 펄프와 묽은 펄프의 점액을 그대로 표현수단으로 끌어들이는 다양한 경향에 이르기까지 방법적인 모색의 진폭이 넓은 편이다. 전광영의 방법은 단순한 소지로서도, 그렇다고 펄프의 변화과정을 직접적인 조형수단으로 원용하지도 않는다. 그의 방법은 한지가 갖는 질료에서 풍겨오는 독특한 정감에 맞추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이 독특하게 군집(群集)되면서 풍겨주는 그윽한 질료와 향기를 현대적 조형방법을 통해 다시 구현해 내려는 데 그의 방법적 특징이 있다.

한국인들에 종이(한지)는 단순한 질료에 머물지 않는, 생활의 정서 속에 깊게 침투된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지는 단순한 물질로서보다 생명이 있는 질료로서 내밀한 존재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기계적인 수단에 의해 제조된 것이 아니라 수공업적 단계에서 생산된다는 측면에서도 인간적 체취를 진하게 접할 수 있다.

한국인이면 누구에게나 유리창이 아니라 한지로 된 창호를 통해 반사되던 햇빛의 넘치는 정감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 빛이 만들어 놓던 한없이 고요한 명상의 세계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한 경험이 없다면 한지는 단순한 종이라는 물질에 머물고 말 것이다.

전광영이 보여주는 군집(群集)된 종이묶음이 불러일으키는 정감도 이와 같은 종이의 질료에서 유인되는 어떤 것이다. 한지는 소박하면서도 질긴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은은하게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가고 있다. 전광영의 작품이 보여주는 소박한 구성과 화면 전면에 흐르는 은은한 기운도 일차적으로 한지가 지닌 내밀한 속성에서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광영은 이 같은 종이의 속성에 자신의 독특한 상상력을 부과시켜 놓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단순한 종이를 매체로 한 꼴라쥬의 작업이 아니다. 오랜 시간의 저 너머를 넘나드는 정서의 환기 속에서만 그의 작업이 지니는 참다운 의미를 터득할 수 있다.

전광영의 근작은 평면이라는 바탕에서 이루어지지만 일종의 부조적 표현수단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입체적인 평면작이라 말할 수 있다. 종전의 평면작이 보여주던 미묘한 뉘앙스의 톤을 찾을 수 없으나 구성적 패턴에서는 하나의 문맥을 이루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평면작에서 보여주던 반복되는 띠 모양의 얼룩들은 삐죽 삐죽 솟아오른 입체물의 돌기 된 표면이 보여주는 일정한 구조의 반복과 그대로 맥락되는 조형적 요소들이다.

종전의 작품에서나 근작에서 발견되는 반복성과 또 그것이 만들어 놓는 전면성(all over)은 패턴,페인팅과 미니멀리즘의 컨셉을 연상시키면서도 독특한 빛의 연출은 그의 깊은 정신 속에서 우러나온 고유한 정감의 결정체에 다름 아니다. 우리들을 끝없는 명상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그의 작품은 현대회화에서의 정신의 문제를 다시금 생각케 하고 있다.(1997)